사도행전 5장 17절부터 보면 대제사장과 사두개인 당파의 사람들의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병자를 낫게 한 사도들을 공공감옥에 감금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사자들을 보내어 사도들을 끌어내셨습니다. 구출된 사도들은 이튿날 아침부터 여느 때처럼 성전에서 복음을 가르쳤습니다. 그러자 경비대장으로 하여금 군사들을 데리고 가서 사도들을 잡아와서 공회에 재판을 받게 합니다. 하지만, 유대교 최고 지도자들인 대제사장과 사두개인 당파사람들은 5장 40절에서 이 결정을 내립니다.
“그들이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행5:40)
유대교 최고 지도자들은 사도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못하도록 사도들을 채찍질로 협박한 뒤에 석방하여 주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은 낯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도행전 4장에서 행한 짓을 5장에서도 똑같이 반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사도행전 4장 이전에는 무엇을 했습니까? 그때도 산헤드린 공회원을 ‘다’ 모으고, 예수님을 죽일 것을 결의했습니다. 오늘 본문 이후에는 또 무엇을 했습니까? 산헤드린 공회원을 ‘다’ 모으고 사도 바울을 죽이기로 의결한 뒤, 집요하게 바울의 목숨을 노렸던 사람들 역시 그들이었습니다. 한마디로, 그들은 자신들의 모든 가능성을 ‘다’ 한데 모아, 어리석게도 날마다 진리를 짓밟고 유린하는 똑같은 삶을 반복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삶의 반복은 기득권과 욕망을 지켜 주었을 것이지만, 하나님 앞에 설 수밖에 없는 순간에는 무익한 삶의 반복을 통탄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통탄을 누가복음 13장 28절을 비롯하여, 수 차례에 걸쳐 예고하셨습니다.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눅 13:28)
욕망을 위해 그릇되게 반복된 삶은 반드시 이를 가는 통탄 속에서 끝난다는 것, 이것이 생명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반면에 사도들은 어떤 반복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자신들을 찾아온 병자들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 낫게 하는 선한 일을 하고서도 도리어 감금되어 산헤드린 법정에 소환된 사도들은, ‘왜!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는 명령을 어겼느냐!’라는 유대교 최고 지도자들의 추궁에 이렇게 답했습니다.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행 5:29, 32)
사도들의 당당한 답변의 모습과 내용은 우리에게 친숙합니다. 왜냐하면, 사도행전 4장에서, 이미 성전 미문 앞 앉은뱅이를 고쳐 준 것과 관련하여 두 사도가 심문을 받을 때도 진술 내용과 태도가 동일했음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사도들의 삶 역시 반복의 연속이었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과 차이점은 유대교 지도자들의 반복이 자기 욕망을 위한 삶의 반복이었다면, 사도들의 반복은 진리와 생명이신 주님의 위한 삶의 반복이었다는 점입니다.
사도들이 주님을 위한 삶을 반복했던 것은, 주님께서 먼저 은혜 베푸시기를 반복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은 주님의 은혜를 반복하여 체험할수록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성장과 성숙으로 이어졌습니다. 동일하게 주님을 위한 반복을 살았던 사도바울은 자신의 죽음 앞에서 고백합니다.
“ …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디후 4:6~8)
사랑하는 삼일교회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 지금도 우리에게 은혜 베푸시기를 반복하십니다. 날마다 같은 공간에서, 같은 일을 반복하더라도, 그 반복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 안에서, 주님을 위한 반복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